
연푸른 바탕 위에 두 개의 굵직한 회색 수직선이 솟아 있다. 회색과 갈색의 물감 자국이 화면을 거칠게 가로지르고, 형체는 곳곳에서 뭉개지고 지워졌다. 거대한 파괴의 흔적만 남아 무엇을 그렸는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2005년에 그린 ‘9월’(사진)이다. 얼핏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 장면을 담고 있다. 공교롭게도 리히터는 그날 뉴욕행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테러 직후 미 영공이 통제되면서 비행기는 캐나다 핼리팩스로 우회했고, 그는 사흘 뒤 독일로 돌아갔다. 세계가 실시간 영상으로 참사를 목격하던 순간 그 역시 미디어를 통해 사건을 마주했다. 그러나 리히터는 이 거대한 비극을 곧바로 화폭에 옮기지 않았다. 당시 보도사진과 영상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참사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몰라 4년을 고뇌했다. 2005년이 돼서야 두 번째 비행기가 건물에 충돌하는 보도사진을 토대로 붓을 들었다. 그